2025년 9월 5일 금요일

3운법칙의 경이/驚異 및 그 막강한 생명력은 그 정해진 시기와 목적이 명확히 밝혀짐에 있다

지금은 주님 재림이 임박한 때로서 악마와 그 일당들의 최후 발악이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믈들이니까 초능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인 줄 아는 우리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지식이 전혀 없는 세상 사람들은 악령들의 속임수 횡포에 대책 없이 휩쓸리고 요동치는 상황이니 여기 덩달아 놀아나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 시간을 낭비함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초능력을 "고도로 발달한 문명, 운운" 하며 소위 "외계인" 소동으로 위장하기에 그렇습니다. 어디까지 확장될는지, 아마 그런 "외계인에 의한 지구 창조" 정도로 확대되지 않을까,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결국 자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성경으로 애초 세상에 나타나신 창조주 하나님의 확실성 및 그 검증은 오늘날 21세기 3위1체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으로 완료/완성되었음을 항상 명념합시다. 인간의 모든 생애 하나하나가 모두 3가지 유형(3운법칙에 따른)으로만 철통 관장 지배되고 있음을 저학년 초등생 정도의 셈법을 아는 이면 누구나 <직접 검증 확인할> 수 있도록 완전 개방되어 있음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점이 우선 가장 특출한 그 자체 증명의 하나입니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런 특이성이야말로 사상 초유의 전무후무한 유일 사례라 하겠습니다. 창조주의 손길이 친히 움직이심을 목도하게 되는 그 놀라운 증거입니다. 금상 첨화로, 이 3운법칙이 왜 정해졌는지 그 정해진 <때>가 성경에 무언중에 밝혀짐으로써 그 설정된 <목적> 또한 동시에 대낯같이 그림처럼 밝혀져 최근 완전 공개되었다는 것은 경약 그 자체입니다.

마치 모세 시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비할 정도의 직접 들려지는 3운법칙 관련 설명이시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3운법칙은 처음 아담 때로부터 설정된 것이 아니고 가인의 아벨 살해를 거쳐 라멕(창 4:23)의 "소년" 살인 행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하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8,9백세였으니까 "소년"이라면 50~100살 정도였는지 모르나, 최소한 노아 때까지는 모든 인류가 팔구백년 훌쩍 넘겨 살았던 당시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라멕 이후 즉 라멕의 "소년" 살해 사건이 있게 되는데 바로 그 사건 뒤 3운법칙이 청해진 것임이 확인되는 바 왜냐 하면 950년 수명의 노아 생애 도표가 산뜻한 SN유형으로 확실하게 정해져 있음을 보기 때문. 따라서 아벨과 예의 그 "소년" 외에는 아담부터 노아까지 인류는 천년 가까이 살았으니까 "소년" 살해자 라멕 이전까지만 해도 3운법칙이 정해져 있지 않았음은 명백한 사실이 됩니다. 이유는 "소년"이 죽었으니까. 그러나 노아가 3운법칙 따라 생애를 마쳤으므로(950세로 장수했어도) 3운법칙으로 인간의 죽는 때를 정하신 그 <때>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아무 목적 없이 3운법칙이 설정되어 인간 수명이 철저히 통제될 리가 만무한 것. <특정 시기>에 정해졌으니까 <특정 목적>이 있게 마련. 다시 말해 사람의 죽는 때를 강제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강제하시느냐 하면 죽을 때가 오지 않으면 '사람'으로든 '사건'으로든 사람 목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처하심입니다.

이 <사람 죽는 때 정해짐>이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때를 따라 정해져 실현된다면 그 실현시키는 주체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달리 그 어떤 설명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이성과 지성이면 모든 인류에게 통하는 확고무오의 설명인 것입니다. 바로
<성경으로만 알려지신 하나님>이십니다.

(5ㅡ끝)




리가 하나님 계심을 알고 그 만유 주관하심을 확신할진대, 한 가지 확고부동의 기준이 서 있음을 보는 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실 때 공평공정을 기하신다는 것. 따라서 사람마다 적용 잣대가 서로 다른 듯이 보일 때 그것은 임시적 과도기 현상이고 일시일 뿐이라 정상(영원성)이 아니고 비정상이라 한 때 스쳐 지나감뿐이라는 증거.


둘째는, "천국"과 "불 못"은 영원한 양면성임과 같이, 고로 불변의 진실임이 자체 증명이 됨과 같이, 짝의 법칙은 영원 불변의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즉 생명과 죽음은 대칭을 이루고 그 중간도 없고 그 외 달리 무엇이 있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처럼 생명이라 인식되는 것과 죽음으로 보이는 것이 한데 뒤섞여 있듯이 보일 때, 그것은 죽음 일색일 뿐 "뒤섞인" 것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짝을 이룸은 반드시 인과, 주종, 선후, 대소 관계를 이룹니다. 서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대등하면 애시당초 짝이 형성되지를 못합니다. "남녀 평등"은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짝을 이룬 둘은 동시에 창조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자연계 생물의 양성 생식에서 수컷에게서 암컷이 나온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먼저 '본'을 뜨고 그 다음에 그 '짝'이 되는 것을 맞춤과 같은 이치입니다.

처음부터 뒤섞였다는 것은, "본"이 되는 것이 제 구실을 못했다는 의미이므로 원본은 폐기되고 그 짝이 되었던 것만이 남게 됨이며 고로 다시 새로 작업하여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실상을 생명 아닌 죽음으로만 인식하는 유일한 설명입니다. 아담 범죄로 죽음 일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죽음'과 '비정상"인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오직 장차 빛날 생명의 하나님 일에만 몰두하는 것만이 다가올 생명의세대에 참여하는 오직 하나뿐인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의 "죄의 몸" 이 "죽음"으로 끝나고 "부활"로 새로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위 설명처럼 현재의 모든 세계가 죽음과 "저주"(창 3:17)로 덮여 있고 주님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는 변함 없는 상태임을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으니까 이를 항상 명심하고 혹여라도 착각함이 없어야 합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인식 전환>입니다. 세상과는 차별되는 성경(하나님 말씀)적 인식 오직 하나뿐. 육지에서는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고 바다에서는 가라앉지 않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堡壘(fort)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과 "연합한"(고전 6:17) "한 영"(:17)됨입니다. '머리'되신 주님과 우리가 이렇게 <한 몸>으로서의 '몸"이라 "하나"(요 10:30)되어 있으니 주님이 영원불변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단 지금은 천하가 죽음과 저주 일색인데다 하나님의 "매일 분노하심"(시 7: 11) 아래 있는 "때"(전도서 3:1)인지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골 1:24) 것이 필연인즉 이에 항상 유의해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24)입니다. 세상에서 갖가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음은 이 때문입니다. 인내로 기쁨으로 맞아야. 이 "바벨론 탈출"의 세계적인 말씀 전파 다음 순서로는 반드시 스데반의 순교와 같은 죽음("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ㅡ계 13:15)이 닥칠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이와 같이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어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그 영(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시어 영원히 함께 계시니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에서 우리 둘은 완전 하나됨이라, 양자역학적으로 표현하면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이 각각으로 나타나는 조화를 부리는 것같지만 엄연히 <둘이 하나>로서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만 아니시고 성자와 더불어 성부 친히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신 것이니 주님이 나와 하나되어 계심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렐루야")!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 받음이 구세주 우리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오셨음과 똑같다(요 20:21) 하셨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하신 대로 <머리>되신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같은 사명을 띠고 우리도 파송됨인즉 악을 응징하고자 함이 아니요 나 자신을 온통 바쳐서라도 사람들을 구출해내고자 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음은 악을 응징하는 심리이지 구출하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취지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분부를 내 멋 대로 무시함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중심 즉 자기가 자기를 위하려는 모든 욕구는 생명 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욕심"(약 1:15)이요 악이요 죄의 원천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내 이웃이 전적으로 나를 위함에 있으므로 내가 나를 위하면 1로서 그치나 내 이웃이 1억이면 1억배로 내가 위해지는 까닭에 가장 이상향적 삶의 방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2025년 9월 4일 목요일

(4)




아담 범죄 이후 우리의 육체 자체가 썩음과 죽음의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온상/溫床인 동물성 육체일 뿐만 아니라, "죄의 몸"(롬 6:6)인지라 죄의 화약고/火藥庫인데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사람(아담)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닌 "원수"(창 3:15) 사탄 과 그 일당인 악령들(네필림과 그 죽은 망령들인 많은 귀신도 포함)에게 그 통치권이 "넘겨진"(눅 4:6) 상태라 365일 24시간 그들이 인간 세상에 군림하여 그들에게 시달리는 참담한 나날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과 속임수도 그 일환으로 성경은 가리켜 마귀가 "온 세상을 꾄다(속인다)"(계 12: 9)'고 한 것. 따라서 악령들이 우리(하나님께 속한)가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방치해 둘 까닭이 없습니다. 반드시 못살게 집적이게 되어 있는데도 이런 현실을 뭇하고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고 꿈꾸는 절대 다수ㅡ완전히 사탄 아래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계시는 터라 모든 것을 회복하심이 필연이지만, 만유는 "때"(전 3:18)와 순서를 따라 진행되므로 주님의 재림이 시작되어야 멸실 공히 그 통치권이 정식 발효되기에 지금은 인내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정작 복이 있는 자는 이러한 이들입니다.

불신자도 세상을 "고해/苦海"라 했으니까말 다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절대 "사람 삶의 세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해,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은 그럴수록 어리석게 도 살려고만 무턱대고 발버둥치는 것. 우리는 그렇게 헛되이 발버둥침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사람들을 구원해 건져 올리는 "사람 낚는 어부"(마 4:19) 일에 열중함이 현재 유일한 낙입니다.

그런즉러므로 때마다 우리가 피차간 강조하는 것은 세상 삶의 낙(그나마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에 한눈파는 일이 없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입니다.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 것은 오로지 썩음으로만"(골 2:21,22/창 3:3) 종결되는 이 세상이라, 스스로 멸망에 빠져 들어가는 지름길 밖에 더 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아니까.

우리의 구원은 가장 먼저 이 "죄의 몸"부터 척결함이 첫째 순서이고 이는 이 육체가 죽어 망하는 것으로만 해결되기에 주님 메시야(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허나, 죽음으로만 끝나면 아무 의미(소용)가 없고(고전 15:14- 18), 그 죽음에서 부활해야만 새 창조가 되는 까닭에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됨으로써 이 일이 완성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에서 그 흘리신 피가 내 죄를 씻는 보배로우신 피(보혈)이기에 내 죄가 용서되고 그 부활로써 나는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의 "새 창조"(고후 5:17)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이론만으로 써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그 영(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내 안에 내 영혼이 있듯이) 친히 나와 "하나"
(요 10:30) 곧 "한 영"(고전 6:17)이 되심이니까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성령이 누구시며 3위1체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이제까지는 이 사실을 몰라도 그래서 제대로 설명을 못해도, 참으로 회개하고 참으로 믿으면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신지라 성령(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로 계심)께서는 임하여 오셨고 우리 구원에 일절 하자가 없었던 것. 남녀노소 불문이므로, 어린 아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회개와 믿음이 없이 저절로 구원 얻는 일이 없는 것은 인간이 타고나는 것이(시편 51:5) "죄의 몸"이므로 이 죄의 몸이 "멸/滅해져야"(롬 6:6)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아 또는 믿지 않고 세례 받지 않은 어린 아이가 죽으면 멸망인가? 그가 구원 받으려면 충분히 철들어 복음을 이해하고 세례를 받을 정도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구원되지 못한 것입니다.

소위 "유아세례" 등은 무의미한 인위적 종교 교리에 해당하는 것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노아 홍수 당시 죽은 자들도 회개하여 믿어 구원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영으로...전파하셨으나"(벧전 3:19/4:6) 이런 유아들이 그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가서 복음을 듣게 되는지 여부는 미상이요 우리가 궁금히 여길 대상은 아닙니다.

아니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그 영혼들이 네피림일 수도 있다는 것. 죽은 망령으로 떠돌던 네피림 즉 귀신이 무차별적으로 아무 산모의 태에나 들어가 사람 태어나는 달수를 채우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 비일비재니까. 어뗜 사유로든 철도 들지 않았는데도 요사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네피림은 원천적으로 구원이 불가입니다. 악령의 씨에 불과하니까. 이렇게 해서 네피림이 재차 생겨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윤회", "전생", "환생" 등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죽은 자의 세계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있는지라 충분히 구원될 기회가 있으니 굳이 세상에서 복음 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는 악하고 미련한 생각을 혹 품는 자가 있겠으나,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전 9:6) 했으니, 반드시 전도 활동은 수행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대한 명백한 불순종과 정면 도전이 되므로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 찍혀 그 결말은 영원 "불 못"일 뿐입니다.

전도 활동이 다름 아닌 사람 살리는 목적인즉 만나는 사람마다 그 대상이고 이 일에는 교회를 운영하는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더구나 "양 무리의 본"(벧후 5:3)이어야 하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또한 이 전도 활동에는 불신 세상을 위한 끊임 없는 제사장적 기도가 수반되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는 열아홉 전후 나이에 출가한 후 7년 뒤 과부 된 지 84년 넘게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긴 우리의 기도의 사표/師表입니다(눅 2:36:37).

그리고 주님이 경고하신 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눅 9:26)이는 경고 말씀 역시 불변입니다. 사탄 아래 있는 세상이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그 추종자에게는 시종일관 적대적이고 우호적이었던 역사가 없으니까. 우호적인 듯 싶어도 올무와 함정이라 약화시키려는 음모일 뿐이니까.

적과 싸우되(창 2:15) 우리는 적지/敵地에 위치하기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으며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고귀한 자)가 많지 않다"(고전 1 :26)고 한 이유입니다. 이 세상이 사탄의 적지/敵地입니다. 하나님 편은 당연히 막강하지만 현재 눈에 보이어 인식되는 것은 모조리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나기에 이는 당연지사로서 수용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일임을 우리 각자는 자기 위치에서 명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이 평등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보내심 받아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일을 하는"(15:58) 위치입니다. 맡겨진 일에는 오직 충성만이 요구됩니다(4:2).

'왕이 말하기를,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을 것이다." 혹이 왕에게 고하기를 "엘리사가 도단에 있습니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말이 끄는 전투 수레)와 많은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밤중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다.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을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대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부르짖기를 "아아, 주인님, 우리가 어찌 할까요!" 엘리사가 대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 하고 기도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원하오니 이 종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 주십시오" 한즉,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 주시므로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꽉 차 있어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다'(왕하 6:13-17).

오늘날의 엘리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어 365일 24시간 함께 하시는 만유의 주재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요 14: 16)이라 약속하심과 같습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어도 살고, 지는 것같아도 최종적으로 이기고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는 일시적으로 비록 "약하고 천하고 없는 자"(고전 1:26-31)의 모습이나. 엘리사의 종의 경우처럼, 우리들의 부홣하신 주님처럼,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계속)

2025년 9월 1일 월요일

(3)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 14).


성경은 누가 읽어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결론은 우리의 상식에 속합니다. 왜냐 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됨이 아버지 뜻입니다"(마 11:25,26) 하셨기 때문. "어린 아이" 상대로 말씀하시면서 반어/反語 등과 같은 또는 기타 어려운 말을 구사하실 리 만무하신 것입니다.

위의 말씀에서, 용서하지 않는데 "모든 사람과의 화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 즉 삶 자체가 하나님만 섬김, 하나님만 위함을 뜻함이니 곧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고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 :7-9)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나타나지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살아야)"(마 7:21) 영생
구원입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21) 하셨으니까.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까. 다시 말해 나는 주님의 소유,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께서는 나의 것,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우리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 엄정한 생명의 법칙대로 따르지 않고 제아무리 주님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고 곱백번 믿은들 그것이 구원 받음이 아닙니다. 괜히 구원 받았다 하여 자기만 속이는 꼴입니다. 평생 이렇게 자기를 "구원 받았노라"고 속이다가 마침내 죽고나서야 "속았구나!"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온다고(롬 10:1 7) 내가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런 이기적 욕심 하나에만 매달린 채, 하나님 말씀 자체에 대한 애착이 없어 성경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함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 사랑도 그 말씀 사랑도 아예 없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을 어슬프게 가르치고 어슬프게 배우고 피상적으로 인식한 결과입니다. 사랑은 자율/自律로서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임을 명심해야.

성경이 칭찬하는 "베뢰아"(행 17:11) 교회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롬 12:11)는 성경의 명령을 무시한 참담한 보응 그 비극적 결말일 뿐입니다.
지금 나의 삶을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나 자신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하나님의 뜻읋 행할 수 없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 삶을 비로소 입에 담을 수 있다고(마 7:21) 못박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주님과 하나되기 때문이요, 갑과 을 하나됨의 필수 요건은 갑 안에 을, 을 안에 갑 즉 갑의 소유는 을의 소유,  을의 소유는 갑의 소유됨에 있어요. 더 다시는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육체로 하나됨은 "한 몸"(창 2:24)됨으로서 즉 남펀 몸은 아내 것이 되고 아내 몸은 남편의 소유가 됨입니다(고전 7:4). 자기 몸 자기 것이라 하여 자기 마음대로 해서 다른 이와 육체 관계를 맺으면 그 상대가 비록 창녀(6:16)라 할지라도 이로써 아내 남편 하나됨은 깨어져 무효가 됩니다(마 5:32/19:9).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요 17:10)이라 하실 때 이는 "한 영"(고전 6:17)됨이니, "아버지께서 제 안에,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시어"(요 17:21) 하심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저도 그들을 보내었고"(: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심과 같이 구원 받은 자의 향후 일체의 (영원한)삶은 각자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머리-몸의 "한 몸">을 이루어 세상에 보내심 받은 영광스러운 대아/大我의 삶의 시작임을 명심해야. "대아"ㅡ지금은 "마지막 아담"이신 우리 주님의 재림이 아직 이뤄지지 않아 죽음의 세상에 처해 있어서 그렇지 우주 만유에 충만해 있는 영광과 생명을 다 함께 하나로서 누리는 그 놀라운 살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들을 위하여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17:19) 하심과 같이, "거룩함"의 본질은 자기 부인 곧 자아중심의 반대 개념으로서 특정 <상태>를 지칭함이라기보다 <매일매시의 삶의 의지>를 가리킴이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짐"(눅 9: 23)이라 하셨듯이. 자연계 동식물과 같은 기계적 삶이 아닌 '자유 의지'의 영적 삶을 영위함일진대 이는 당연지사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국적 견지에서 시야를 넓힐 때 원수 사랑 또는 남의 죄 용서가 그렇게도 "대단한" 것이고 "불가능한" 것일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미친 소리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파송 받은 하나님의 "사신/使臣"(고후 5:20) 또는 대리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20) 하나님의 사람 사랑의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달한다면서 사사로운 이해 관계 따라 희로애락을 나타낸다?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일지?

더군다나 나면서부터(아담 범죄 후) "죄의 몸"(롬 6:6)에 포로되어 불가항력으로 나타내는 그들의 언어심사인데도(7:24)? 우리가 그들의 죄의 응징자인가요? 하나님의 심판자로서의 대리인인가요?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심부름꾼)" (롬 13:1-7)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심히 고귀/高貴한 "각 지체 각 부분"(고전 12:27)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를 드러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전도요 기도의 구령/救靈 차원으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스스로 <살기> 위해 세상에 남겨진 무리가 아니라 남들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보내심" 받은 신분임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바로 이 현상에 당시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을 뵙듯 마음에 큰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생명처럼 여기고 부자됨을 최고 목표로삼는 인간 본성/죄성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가히 <경천동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바로 이것이 큰 증거가 되어 이후 야만적인 극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그에 대한 믿음이 가시적으로 드러남을 인식하는 마당이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연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살이의 유화책으로 사탄이 전략을 바꾸어 세상 사랑이 판을 치면서 교회는 이 <사도행전 432>의 영광의 전통을 헌신짝처럼 버리게 되고 오늘에까지 이른 것. "원수를 사랑함"도 "이웃의 죄 용서"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일입니다.   (계속)

2025년 8월 31일 일요일

학문적 탐구가 아닌 계시를 통해 (2)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는 인간이 단지 동물적 육체로 전락함에만 그치지 않고죄의 온상/溫床이 되어버린 더 큰 비극에 있습니다. 동물적 육체 자체가, 자연계 생물의 모든 기계 작용(생존에 필수인)의 원동력로서의 바로 자아중심이기 때문. 그러나 말 그대로의 기계적 작동인지라 인간 등 영적 피조물과 같은 자유 의지로 움직임이 없으므로 가인의 아벨 살해와 같은 범죄의 의미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동적 욕구만 일정량 채워지면 그만이기에. 따라서 창조주의 뜻에서 빗나가거나 이를 무위로 돌리는 따위의 일이 없어 처음 창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정상 가동입니다. 다만 아담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 받음으로 인한 후유증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자연계 동물과 다르니원래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지라 선악과를먹은 후의 이 동물적 육체로서의의 자아중심 성향 자체가 바로 죄와 직결되어 그 기폭제 역할을 하는 비극적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는 "욕심"(약 1:15)으로서만 작동되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사람 나자말자 살인죄부터 저지른(가인의 아벨 살해ㅡ그것도 아우가 자기보다 나아 보인다는 열등감 때문에) 것이 그 증거.

이와 같이 아담 범죄후 모든 인간의 육신 자체가 죄의 발화점/發火點이 되어 있는 고로, 가인이 제 아우를 죽여놓고도 "저의 죄벌이 너무 중하니 견딜 수 없습니다...저를 만나는 자가 저를 죽이겠습니다"(4:13 ,14) 하고 호소하자, 하나님이 이를 들으시고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조처를 마련해 주신 것이니, (아담이)선악과를 먹자말자 모든 인간의 몸이 "죄의 몸(the body of sin)"(롬 6:6)이 되어버렸기에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구나!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오호라...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4- 24) 하는 장탄식을 토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고로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0-22)라 한 것입니다.

이 바울 사도의 설명은, 순종의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니, 조급하게 결론 내리려 하지 말고 찬찬히 앞뒤 문맥을 제대로 살펴야.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을 통해 사탄은 바로 이같은 의미로 슬쩍 돌려 거의 모든 사람을 멸망에 빠뜨려 왔던 것이니 소위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과 "행위(행함)로 얻는 구원"이라는 2분법을 지어내어 "구원"의 의미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혼동시켜버린 것. 행함 없이 무슨 순종이 있고 순종 없이 어찌 생명이 유지된답니까! 창조주의 모든 뜻에 복종함이 피조물된 자의 일차적 책무가 아닌가요!

지금 "죄의 몸"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는 가장 시급한 것이 <산 자>가 되는 것이지,⁷ 죽은 자로서 그 아무리 순종하여 선한 행위를 한들 일절 무의미함을 바울은 설명한 것입니다. 바로 이 "산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라 합니다. 새로 창조되었다 해서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니니, 창조는 똑같으니까 차별이 없습니다.

고로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경우 사탄 및 악령들처럼 되어 그들과 함께 멸망의 운명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입니다(빌 2:12). 시험 받음은 이 세상에만 한하는 것이며 세상 끝에 "마지막 심판"이 있는 이유입니다. 시험 '기간'과 '장소'로서의 <이 세상>이 종료되면, 다시는 시험이 없으니 인간이든 영물이든 충분히 다 다루어졌기 때문.

우리의 구원(주 예수님의 나 위하신 죽음을 믿음으로써 성령 받아 모심을 인한)은 이같이 <산 자>되기 위함입니다. 죽은 자로서의 "옛 사람" 은 종료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출발함입니다. 그런데도 "구원" 자체를 오해하여 마치 <천국 직행>쯤으로 착각하는 이가 거의 전부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아담 창조, 천사 창조와 같은 "새 창조"이니 창조는 똑같고 우리라고 "새 창조"라고 특별 취급해 주시지 않습니다.

똑같이 세상에서 시험 대상이고 아담처럼 불순종일 때 가차 없는 탈락 대상입니다.
아담은 '선악과' 관련인지라 그 죄의 결말이 신령한 몸을 잃는데 그쳤지만, 우리는 모든 지식이 있음에도 이를 멸시한 고의적인 범죄로 분류되니까 악령과 같은 영원 멸망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말씀의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갈랫길을 명확히 갈라내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 :19) 한 바와 같습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미리 정리해놓기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2:6), "참고 선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영생으로... "당/을 지어...불의를 좇음"(한굴개역은 그러하나 영역으로는 자아중심 "self-seeking"이라 명시)에는 분노로 하신다"(2: 7-9) 한 것입니다. 산 자이니까 순종을 요구하시지, 죽은 자에게 순종을 바라시지 않고 오직 산 자가 되기를 곧
메시야 구세주님을 믿어 구원되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복종은 구원된 자. 산 자, 성령 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그 대상임을 우리 영혼 깊이 아로새겨야.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죄의 몸" 그대로인 채 즉 메시야 우리 주님을 믿어 구원 받음 없이, 제아무리 선행을 하여 순종을 해도(그리스도를 배격한 당시 유대인처럼) 일절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것입니다. 거듭 역섦하지만, 순종의 행위, "참고(인내로써) 선을 행함"(롬 2:7) 자체를 부정한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영생은 선을 행하는 자의 몫이요 영원한 부끄러움의 멸망은 자아중심의 악을 행한 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영원 불변입니다(2 :8-13).

혹자는 이러한 논거를 두고,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13)이라 했으니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행함으로 얻는 구원>으로 구별함이 아니냐" 하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엡 2:1) 한 것입니다.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엄청난 차이. 처음에는 죽은 자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롬 5:12) 곧 이제는 산 자가 아니요 죽은 자이니 행함을 강조해서는 안되고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 자>부터 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산 자>로서의 행함(순종)이 비로소 요구되는 순서입니다. 왜 이런 현격한 차이, 당연한 단계와 순서를 간과히느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아담을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 "죄인"으로 "죽은 자"로서 만드실 리가 만무합니다. 거룩한 의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시초부터 완벽 그 자체이니까. 모든 천사도 그와 같이 창조하셨기에 사탄처럼 범죄치 않은 영물들을 가리켜 성경이 "거룩한 천사" 라 함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똑같이 거룩한 천사로 만드셨음에도 범죄를 하게 되니까 사탄과 기타 많은 악령들 곧 그 추종자도 생겨난 것.

이와 같이 아담을 의인으로 만드셨지만 말씀 곧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죽은 자 즉 동물적 육체로 퇴화/변환되어버려 오늘날까지의 이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의인 아담이 이같이 범죄(불순종)로 죄인으로서의 죽은 자가 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것이 즉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는 것이 산 자부터 되는 것즉 이전의 의인 상태로 환원됨인 것.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모든 명령("뜻"ㅡ마 7:21)에 순종하는 "참고 선을 행함"(롬 2:6,7)이 의당히 요구되는 것이며 또한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매시야 우리 주님 오시기 전에는 이 일이 전적으로 불가능했던 것. 그래서 그 어떤 순종의 행위도 무익하다 곧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바울 사도는 당시 유대교 사상에 미혹되어 교회 내 분란을 일으킨 이들을 훈육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 범죄의 비참한 결과물로서의 "죄의 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죽지 않는 한 절대로 해결이 나지 않는 것임을 성경은 반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죽은 후 다시 살아나는 데에 구원이 있는 것인즉 때문에 메시야 우리 구세주께서 사람되신 것입니다. 즉 육체로 말미암았던 "첫사람 아담"과 대칭으로 유일무이의 구원의 방법으로서 "마지막 아담"이 되심이요 이로 말미암는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입니다.

곧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 /4:24/골 3:10)됨입니다. <육체>로는 남녀 "한 몸"(창 2:24)됨뿐이나 <영>으로는 "한 영"됨이니까 사람마다 차별 없이 "하나"(요 10 :30)됨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성령으로 남입니다. 왜 둘이 짝을 이룬 하나됨이 우리 구원에 필수이냐 하면, 앞서 지적한 대로 그 죽으심만 아니라 그 부활까지 나의 것이 될 수 있어 내가 직접 죽은 것이 되고 내가 다시 사는 것이 100% 사실 그대로 구현되기에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거짓말투성인 사탄의 바벨론 신학처럼 메시야의 죽으심만이 우리 구원이 아닙니다. (이 혼돈에서 소위 "대신 죽음"이라는 어슬픈 거짓말도 생겨납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까지가 통틀어 우리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에서는 그 "하나" 구성의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상반/相反은 상보/相補"라는 철벽 구조가 자리잡고 있으니 상반은 짝을 이루었다는 것이요 상보는 그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로서 존재하고 움직인다는 것으로 맞추어집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성경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한 몸"(고전 7:4)됨에서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요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됨인 것. "한 영"에서는 삶 자체가 그러하여, 짝을 이룬 갑과 을 둘이서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함입니다.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 영원한 이상향적 삶의 완전무결의 방안입니다.

다시 말해 향후로는 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습니다. 자아중심으로 흐른다는 자책과 자기 반성을 하기 무섭게 급격히 자기 부인으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처럼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미래가 역시 사탄처럼 운명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바로 여기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빌 2:12)는 경고가 유효한것입니다.

구원을 아직 못받아서 "이루라"가 아니라이미 받은 구원을 "스스로 지키라"입니다. 아담의 경우라면 허나님이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신 그 영생의 위치를 지키라는 것, 하나님 말씀에 지극 정성으로 유의하여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주님 분부하신 대로 문을 두드리고 찾고 구하지 않고 남의 덕에 앉혀서만 영생해보겠다는 안일하고 게으른 탓)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 받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최종 단계에 안착한 그런 단순 의미가 아닙니다. 아담 범죄 전 상태 더 정확히 지적하면 새롭게 창조됨으로써 아담의 창조된 순서를 다시 새롭게 밟아가는 과에 있을 쁜입니다.

단지 차이는 아담 당시는 아담 혼자였고 시험하는 자가 없었으나 우리는 심한 적대적 위치에 있어 많은 시험자와 방해하는 자가 있다는 것. 단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충분히 모든 것에 대비되어 있는 상태로서 전혀 부족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말씀과 경고는 명백하시며 불변이십니다.

오직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시 가인을 대하심(앞서 지적한 바처럼)과 같은 자세를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는 점입니다. 즉 악인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그 악을 이기고 용서하며 원수를 사랑함입니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것같으나 사실을 알고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명시하셨듯이 우리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죄도 결단코 용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 흘리신 보혈/寶血로써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씻겨져 다 남김 없이 용서되어 구원 받은 것이라 즐거워하지만 오늘 이 시간 누구에게든 용서 않는 앙금이 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나의 죄는 그대로 있고 따라서 구원도 없으니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잃거나 빼앗기는"(눅 9:25) 비극적 참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것만큼은 유동적이라 나의 향후 태도에 전적으로 달렸은즉 세심한 주의가 요망됩니다.

주님 친히 본울 보이시며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알지 못해서 저지르는 향동입니다" 하셨습니다(눅 23:34). "알지 못해서" ㅡ"죄의 몸"(롬 6:6)이 됨으로 인한 비극적결말. 스데반도 죄인들의 돌에 맞아 숨지면서 가장 먼저 그들의 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함을 잊지 않았습니다(행 7:60). 원수 갚으려는 마음, 용서하지 않는 마음 모두 자아중심과 직결되므로 깨끗이 그야말로 황급히 버려야 합니다. 나를 위한 일체의 일은 하나님 몫이지 절대로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다"(롬 12:19) 하심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은 본디부터 별 수 없이 연약하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 곧 멸망시키는 바벨론 신학입니다. 우리는 새 피조물이니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완벽합니다. 강하고 거룩하게 만드시지 결코 약하게 만드신 일이 없으니까. 천하 무적/無敵 "마지막 아담"과 "한 영" (고전 6:17)을 이루어 있기 때문. 하나님 안에서 <강하심>이  세상에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고후 13:4) 것으로 나타난 사실을 우리는 모름지기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어리석은 마음만 버리면 그러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당연히 불가능하나 그 대신 이 한 세상 찰나적으로 잠깐 반짝하자마자 곧장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비애의 영원무궁 속으로 함몰함뿐임을 의식할 때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눅 21:19)이라 하신 경고는 너무나 당연시됩니다.

주님의 나 위하신 죽음은 죄인 사형수의 죽으심이기에 십자가 상의 고난 받으심이었던 것. 그 당시 사형수는 십자가에 못박는 처형 방식이었기에. 우리 인간의 죄와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런 처지의 모습이기에, 바로 이것이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편 7:11) 앞에서의 범죄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실상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실상을 감히 누가 바꿀 것입니까! 누가 감히 변경하여 고칠 것입니까! 우리 각자는 너무 안일하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 실제 모양새와는 완전 동떨어진 것입니다. 결론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생명 아닌 죽음이라 고난 고통의 처절한 아우성의 불길 속에서 한 사람 두 사람 건져 끌어 올리는 구출의 절박한 현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속에 들어가야 물속에 빠진 자를, 불속에 들어가야 불속에 갇힌 자를 구원해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은 철저히 실상이 가려진 채로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되어 지극한 영광을 누릴 피조물이 느닷없이 죽음을 맞아 비참한 몰골로 추락해버렸는데 오죽하겠나요.

성경은 이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이라 했습니다. 모든 인생들과 함께. 그나마도 구원되지 못한 인생들의 장래는 더 비극적이고 처참하여 그 명칭이 영원한 "불 못"(lake of fire)입니다. 다시 지적합니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히 12:29)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 8). 이 하나님의 품성은 만유의 기본 질서로서의 3위1체 법칙(짝의 법칙)으로써만 이해됩니다. "상반은 상보"로서 짝을 이룬 양자/兩者는 둘이 아닌 하나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이라,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 개념이 존재하게 마련. 모순이 아니라 '질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엄/엄위(severity)가 있으니 또 그 정반대인 사랑이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인지라 둘이 동시에 드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양자역학 실험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는 그대로입니다. 전자가 드러나면 후자는 자취도 찾아 볼 수 없고, 후자가 나타나면 전자가 또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철두철미 나를 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역시 그러하시다는 증거가 나 위한 십자가 고난이시니까.)

오로지 사랑만이 있는 것같이 나타나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오로지 위엄의 잔혹성만 있는 것처럼 나타나십니다. 따라서 사랑 일변도로만 생명의 법칙대로 나가면 마치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사랑으로 진행되는 법입니다(롬 11: 22). 우리의 선택에 좌우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만이 불변일 것이요 이와 반대로 나가면 역시 그와 반대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사물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현재 받는 <하나님 앞 사형수>로서의 모든 고난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을 "내 몸에 채움"이니 잠자코 감사히 <인내>하여 수용함이 바로 사랑의 영역입니다. 달리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달리 다른 생각에 사로잡힐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 무한한 장래는 <사랑의 생명>뿐이니까. "원수 사랑" 도 그렇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시니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일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계속)

2025년 8월 29일 금요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학문적 탐구가 아닌 계시를 통해 순수한 은혜로 알아지는 것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다시 말해 동시에 거짓을 말씀하실 리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영생)을 창조하시지 동시에 죽음을 창조하실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해 죽는 존재로서 인간(아담)을 처음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모순이요 따라서 무의미한 말로 끝납니다. 그런 것은 거짓말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처음 창조하신 것인데,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 신령한 몸을 "잃었고" "빼앗긴"(눅 9:25)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런 동물적 육체가 된 것인데 이 경우, "동물적 육체로 환원되었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이유는 애시당초 아담의 동물성 육체(나중에 에덴에 들어가서 신령한 몸으로 진화/변환된)와, 범죄 후의 동물성 육체(범죄로 그 신령한 몸을 잃어버림으로써 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

즉 예컨대 발람의 경우 앞에 길을 가로막고 있는 영물(천사)을 보지 못했으나 나귀의 눈에는 확실히 보여 길을 피하려고 했음과 같습니다(민수기 22:31). 이는 하나님 창조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로서 아담이 일단 동물적 육체를 벗어나 신령한 몸으로 정착되었으므로 다시 동물적 육체로 되돌아갈 일이 없이 일단락된 때문. 따라서 아담의 불순종(범죄)에 의한 동물적 육체는 순수한 돌발 사태로서 별도의 사건이었던 것임에 유의해야 합니다.

때문에 이를 가리켜 성경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 한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고의 원인으로서 썩고 죽게 마련인 동물적 육체로 삽시간에 퇴화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왜 유식한 척 잘난 체하여 "영적" 죽음이라는 토를 부질없이 다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교만, 오만방자함에서 비롯됩니다. 인류의 최초 범죄도 "하나님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그래도 나는 똑똑하다"는 여자의 허영심을 악마가 부추겼기 때문(창 3:4- 6).

다른 말로 바꾸면, 영생 구원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마 18:3) 절대로, 결단코 불가능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어린 아이들에게만 나타내시고"(마 11:25) 남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알고 있다는 자만심에 겨워 있는 자들에게는 일부러 "숨기신다"는 무서운 사실부터 직면해야 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의 주인공만 될 운명뿐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런 어린 아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간단 명료한 언어로 일부러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에 늦게나마 소스라치게 깨달아 아는 자만이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단 한 명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교만할 줄 모릅니다. 말씀 그대로 사실 그대로 수용하고 그 단도직입적 본성을 따라 믿고 순종할 따름입니다. 타고 난 겸손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런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가 죽으면 무조건 영생 구원인가 하겠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아담 범죄로 모든 인간은 "죄의 몸"(롬 6:6)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사탄의 거짓말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혼동시킴에서도 드러나

오늘날 21세기 "바벨론"(계 18:4) 탈출을 명령하심은 사탄의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에서 벗어나라 하심입니다. 그 가장 핵심되는 것이 인간읗 처음부터 "죽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말도 되지 않는 궤변입니다. 왜 말이 될 수 없느냐, 죽음은 생명의 반대 개념으로서 서로 양립해 짝을 이루기 때문. 반대되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생겨날  수 없음이니, 상반되는 '진실'과 '거짓'이 동시에 말해질 수 없는 선후/先後, 인과/因果, 주종/主從 관계에 있기에 그러합니다. 창조주의 권역/圈域은 오직 생명입니다. 피조물에 속한 것이 죽음임을 명심해야. (자연계 생물의 "죽음"은 범죄로 죽음을 맞은 인간을 빗대어 묘사함일 뿐이지 실제는 죽음이 아니라 일종의 신진대사이니, 고양이, 개 등은 지금도 처음 창조된 그 모습 그대로 불변입니다.


거짓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처럼 죽음은 생명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라 이렇게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창조하실 리 만무한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창조는 "오직 진실", "오직 생명"이라는 데에서만 의의가 있는 법이니 두 번 다시 "인간은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추종하지 말 것을 지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엄중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을 감히 거짓말로 둔갑시키는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심판 아래 가차 없이 처단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눈 감아 주셨으나 이제 시대가 변했습니다. 만물은 반드시 "때"(전도서 3: 1)를 따라 작동합니다. 

3운법칙의 경이/驚異 및 그 막강한 생명력은 그 정해진 시기와 목적이 명확히 밝혀짐에 있다

지금은 주님 재림이 임박한 때로서 악마와 그 일당들의 최후 발악이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믈들이니까 초능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인 줄 아는 우리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지식이 전혀 없는 세상 사람들은 악령들의 속임수 횡포...